[넘기다·터치하다·듣다] 종이책에서 오디오북까지… 책의 변천사
기원전 3000년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찍어낸 점토판과 이집트 문명이 개발한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책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이후로 줄곧 책은
실체가 있는 물리적인 사물이었다. 조선 왕실의 사가가 기록한 실록이든,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찍어낸 성경이든, 책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글 묶음이었다.
거의 5000년 만에 이런 책의 형태가 변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대중이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일이 잦아지면서, ‘e북’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책 속의 글자가 전자신호로 이뤄져 물리적 공간이 필요 없는 전자책이 탄생한 거다. 그나마 전자책은 종이책과 닮은 구석이라도 있다. 요즘 뜨고
있는 ‘오디오북’은 아예 전통적인 독서의 개념을 부정한다.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들으면 된다고 한다.
종이책, 여전한 아날로그 감성
세계 최대 온라인서점 미국의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출시한 것은 2007년이다. 전자책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거다. 독서 시장의
혁명이 일 것 이라는 예언도 나왔다.
10년이 지나 확인된 건 근원적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는 거다. 국내 단행본 시장에서 전자책 점유율은 7% 남짓이다. 혁명은커녕 아직 대세도 되지
못했다. 전자책 선두주자인 미국에선 되레 역전 현상도 벌어졌다. 지난해 미국 내 종이책 시장은 2% 성장했으나 전자책 시장은 3.6% 축소됐다.
처음부터 종이책의 아날로그적인 매력인은 그렇게 쉽게 대체될 것이 아니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손맛,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이 주는 지적 포만감 등은 디지털 기기가 채워줄 수 없다. 손때 묻어있는 책들은 웬만한 실내 인테리어 소품이 따라갈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기도 한다. 그래서 디지털 마니아들도 실용서 등은 전자책으로, 소장하고 싶은 문학서적 등은 종이책으로 구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책, 무궁무진한 잠재력
그럼에도 전자책의 성장 속도는 혁명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지난 10년간 국내 전자책 시장 규모는 연간 20~30%씩 커졌다.
전자책은 단점을 계속 개선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전자책 초창기 가장 큰 문제는 읽을 책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요즘엔 웬만한 대중서는 전자책으로
출판된다. 1인 또는 소규모 출판이 가능해, 전자책에서만 볼 수 있는 독립 서적도 있다.
전자책 단말기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눈의 피로도가 문제였으나, 이제는 백라이트가 없는 전자잉크가 일반화돼 단말기 스크린이 종이와 같은
질감을 주고 있다. 해상도도 많이 향상됐다. 리모컨, 블루투스 같은 보조 기능도 개발됐다. 단말기 종류도 많아져 소비자의 선택 폭도 커졌다. 가격은
보통 10만~25만 원 정도이다.
전자책은 당연히 편의성 측면에서 종이책을 압도한다. 가벼운 단말기 하나로 언제 어디서든 독서가 가능하다는 게 전부가 아니다. 외국어 원문의
어려운 단어나 전문 서적의 난해한 개념 등이 나올 때 이를 클릭해 추가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단어 검색도 편하고, 인덱스 기능도 강화돼
있으며, 눈이 피곤할 땐 문자를 읽어주는 듣기기능도 활용할 수 있다.
전자책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비스도 다양해지고 있다. 요즘엔 월정액 서비스가 업계의 뜨거운 감자다. 월 몇천 원 내지 1만 원 남짓한 돈을
내면, 업체가 보유한 서적을 무제한으로 보는 방식이다. 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의 성공 방식을 본 떠, 지난해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된
서비스다.
김영사 전자책팀 박준기 부장은 “초창기 시장에선 책을 많이 보유한 곳이 독자를 끌어 들였다면, 지금은 특별한 서비스가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지금의 전자책 독자는 서비스를 보고 단행본과 전자책을 효율적으로 선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디오북, 귀로 보는 책
오디오북의 등장으로 이제는 아예 ‘책을 읽는다’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어린 시절 잠들기 전 부모가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를 떠올려 보면,
듣는 책도 그리 어색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선 지난해 오디오북 시장이 37%나 커졌는데, 구글 홈 등 인공지능 스피커의 보급이 이유라고 한다.
국내 오디오북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서비스가 시작됐고,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같은 온라인 플랫폼 업체들이 시장을 선점
하고 있으며, 기존 출판사들도 조심스레 뛰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주로 목소리 좋은 연예인이나 성우가 책을 읽어주는데, 아무래도 소설이나 수필 등
문학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룬다. 초창기다 보니 도서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소비자 입장에선 출퇴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게다가 도서정가제 사각지대에 있어, 할인 폭이 크다. 배우 이솜이
낭독한 2시간짜리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는 90일 이용에 3500원, 무제한 이용에 6300원 정도에 올라와 있다. 다만 성우 섭외 등으로
오디오북 제작에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 결국 자본력 있는 플랫폼 업체가 주도하고 책의 다양성은 보장하기 힘들 거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오디오북이 됐든 종이책이 됐든 중요한 건 어차피 책의 내용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사람들은 책을 산 것만으로 그 책의 내용까지 알게 된
것으로 착각한다”고 했다. 읽는 사람이 책 속의 텍스트를 제대로 음미해야 한다는 걸 강조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책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변하든,
책을 대면할 사람이 준비돼 있다면 독서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