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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끌려 시작한 ‘다산 연구’ 44년만에 일대기 냈죠”

2022.07.28 19:08

“1964년 출판 편집을 시작해 잠시도 쉬지 않았어요. 요즘은 중국 소설 <수호전> 번역을 하루 4시간씩 합니다. 

내년에는 끝날 것 같습니다.” 

 

올해 만 83살인 정해렴 전 창비 대표가 지난 58년 동안 편집·교정하거나 번역한 책은 1천 권에 이른다.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한 <한용운 전집>(전 6권, 신구문화사, 1973)과 문학 정본 편집의 모범으로 꼽히는 <채만식 전집>

(전 10권, 창비, 1989)이 그의 손을 거쳤다. 역사학자 강만길, 다산 전문가 박석무, 작가 송기숙·현기영·김주영의 대표작도 그가 

편집했고 사계절출판사가 낸 벽초 홍명희 대하소설 <임꺽정>(전 10권, 1991) 교정도 맡았다.

 

1976년부터 20년 동안 창비에서 편집부장과 대표까지 지낸 그는 퇴사 뒤 실학 전문 1인 출판사 현대실학사를 세워 주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직접 번역해 펴냈다. 최근 자신의 두 번째 책 <사암 정약용 전기>(창비)를 낸 저자를 지난 26일 서울 

공덕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암은 다산 집안에서 주로 부르는 다산의 다른 호다.

창비 시절 <역주 목민심서>(전 6권), <다산시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 다산 관련 책 대부분을 편집한 그는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는 주로 다산 저술 번역에 힘을 쏟아 약 20권을 펴냈다. 박석무 선생과 함께 1996년 <다산논설선집>과 <다산문학선집>을 

냈고 다산의 언어학 저술 <아언각비·이담속찬>(2005)과 의학책인 <마과회통>(2009)도 옮겼다. 이 중 <마과회통>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은 다산의 한문 저술을 우리말로 처음 옮긴 책이란다.

 

“다산의 전체 저술 500권은 요즘 책으로 50권 분량입니다. 이 중 사서삼경 주석서인 경학이 절반이 약간 못 되고 나머지는 문학과 

실학, 역사, 의학 등이죠. 경학을 뺀 다산 저술 거의 대부분은 제가 낸 번역서 20권에 다 담겼어요. 경학은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연구하는 분들도 많아 손을 대지 않았어요.” 그는 이어 “다산 학문 정수는 실학”이라며 “다산은 경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그 기

반으로 실학 저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기는 다산 생애를 촘촘히 따라가며 시기마다 쓰인 다산의 글 원문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행적과 학술·사상에 대한 

평가보다 다산의 삶과 시 등 문장에 초점을 맞췄다. 책에 상당한 분량으로 들어간 다산의 시와 산문은 대부분 그가 직접 옮겼다.

왜 이렇게 썼느냐고 하자 그는 “이게 전기 쓰는 기본 방식이다. 지금껏 나온 다산 전기 중 가장 규모가 클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저희 집안의 먼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다산 6대조에서 저희 집안과 갈렸죠. 같은 집안이라 제가 평가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죠. 

용감하게 다산의 큰 학문을 평가하는 분들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대부분 (다산 학문의) 빙산의 일부분만 보고 하더군요.”

 

그가 보기에 다산은 우리나라 최고 시인이자 학술적으로도 당대 한·중·일에서 최고 수준 학자였다. 왜? “다산은 어려서부터 중국 

최고 시인인 두보의 시를 모방했고 중국 고전 <시경>의 시를 롤모델로 삼았어요. 이백이 보여주는 음풍영월(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즐겁게 시를 짓고 논다는 뜻)을 극도로 배격하고 사회 교화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다산의 시를 보면 두보나 다른 중국 

시인들은 많이 인용하지만 이백은 거의 나오지 않아요.” 말을 이었다. “역사지리는 물론 법·의학·언어·국방·음악까지 아우르는 다산 

학문의 광범위함을 봤을 때 서양에서도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 독일 작가 괴테 정도나 다산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1964년부터 출판·편집·번역 1천권 

76년부터 20년 ‘창비’ 대표작 맡아

1인 출판사 차려 다산 책 20권 옮겨

다산 저술 중 경학 빼고 대부분 번역

최근 직접 쓴 ‘사암 정약용 전기’ 펴내

“다산은 톨스토이·괴테 비견할 인물”

 

인간 다산에게 가장 크게 배울 점을 묻자 그는 ‘이에 걸리는 뼈와 목에 걸리는 가시와 같은 신하’라는 뜻인 한자어 ‘골경신’을 말했다. 

“다산은 무조건 충성만 하는 게 아니라 임금의 잘못도 지적해 바른 군주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골경신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이 때문에 정조 때 벼슬살이하면서 소외된 적도 많아요.” 다산의 삶에서 아쉬운 대목이 뭐냐는 질문에는 “한 개인의 역할로서 그 정

도면 큰 것”이라며 “정조가 다산을 잘 품어 우리 근대화의 초석을 삼지 못 한 게 아쉽다”고 했다. “정조 사후 나라가 급격히 부패해지

면서 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졌잖아요?”

 

이번 전기에는 위대함이라는 수식에 감춰진 인간 다산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나온다. 예컨대 다산은 강진 귀양살이 7년째인 

1807년 고달픔을 못 이겨 경기 남양주 고향에 살던 가족의 강진 이주를 추진하다 역시 흑산도 유배 중이던 형 정약전의 질책 섞인 편

지를 받고 계획을 중단한다. 정약전이 다산을 평한 “성격이 조급하다”거나 다산 매형의 외숙인 이가환이 다산을 두고 한 “재능을 과시

하려는 기운은 많고 깊이 감추어 드러내지 않음이 적어”와 같은 평도 그렇다.

 

창비에서 1978년 <역주 목민심서> 1권을 낼 때 편집을 하면서 다산 학문에 대한 관심도 키우고 한문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는 저자에게 

다산 최고 저술은 뭐냐고 하자 역시 답은 <목민심서>다. “사암의 애민 정신이 다 깃들어있는 저술이죠. <마과회통>은 홍역이나 천연두로 

죽어가는 백성의 피해를 막으려고 썼죠. 다산은 박제가와 함께 소가 아닌 사람에서 천연두를 배양하기도 했어요.”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몇 개의 ‘대형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창비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한국 고전소설 80여편 번역을 

책 16권 분량으로 이미 완성해 출판을 추진 중이고, 한국사 기본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번역도 최근 마쳤다. 역사학자인 아들 

정두영 경상대 강사와 역사 인물 2만명을 담은 <역사인물인명사전>(가제)도 편찬하고 있다. 그는 번역에 힘을 쏟는 이유를 두고 “편집 

교정자가 하는 번역은 학자들과 달리 더 쉽게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잘 다듬어 대중교양서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작업하는 이유를 궁금해하자 그는 “다산도 아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려고 했잖아요. 저 역시 아들 공부시키겠다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간 편집한 책 중 뭐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하자 그는 <채만식 전집>을 꼽았다. “10권 합해 5천 쪽이 넘는 분량

입니다. 원문을 철저히 대조해 편집했죠. 그때까지 나온 우리 문학전집에서 가장 온전하게 편집·교정된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도 

보탰다. “애써 전집을 만들어 연구 환경을 만들어 주니 학자들이 더 연구를 안 하더군요. 전집을 다 읽고 소화해 역사적 전망을 해줘야 

하는데…”

 

출판 편집자로 살며 가장 즐거웠던 때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편집 교정을 하면서 대우받고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한용운 전집>을 천신만고 끝에 만들었는데 누구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천직이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죠. 

제 적성에 맞게 직업을 잘 선택했어요.”

 

그는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나와 바로 교사가 될 기회가 있었으나 학교 대신 출판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정도면 자신이 있는데 그때는 말주변이 없어 교단에 서는 게 자신이 없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